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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를 참조해 보니 다녀왔던 바로 건너편이 북한이라 가슴이 철렁한다.

철도를 살펴보면, 운천역 다음이 임진강을 건너기 바로 직전에 있는 임진강역.

그리고 자유의 다리를 넘어 도라산역...

그다음이 개성공단이 있는 북쪽의 봉동역으로 이어진다.

왼쪽으로 보이는 파란색 화살표를 지나는 선은 남방한계선이다.

 

 여차저차 하여 경기도 파주에 다시 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호젓하게 적은 인원으로 한 車를 이루었으니

약속시간보다 일찍 떠나서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이 어떠냐고...

의견일치가 되어 소풍 가는 것처럼 몇 곳을 들렀다.

 

 황희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냈다는 이곳

파주유적지에는 두 개의 정자가 있었는데...

왼쪽은 '앙지대(仰止臺)' 라 하였고 오른쪽은 '반구정(伴鷗亭)'이라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앙지대가 더 멋있었다...^^

 

 원래 '앙지대'가 있는 곳에 '반구정'이 있었다는데

1915년에 반구정을 현 위치에 옮겨지으면서 그 자리에

황희선생의 덕을 우러르는 마음을 담아 '앙지대'를 지었다고 한다.

 '대(臺)'란 흙과 돌을 높이 쌓고 평평하게 만들어

멀리 경치를 볼 수 있게 한 축조물이다.

그렇다면 어떤 경치가 볼일지 올라가 보자!

 

 짠~~~

풍경이 확 트이며 임진강이 아주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강 건너편은 요즘 콩 농사를 많이 짓는다는

장단반도가 보였으며 그 너머는 북한일 것이다.

아직은 임진강이 군사분계선이라 하여 반으로 갈라지지 않은 곳으로...

날이 더웠는데 이곳에 오르니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아주 시원하다 못해 추웠다...^^

 

 밑으로 보이는 철책이 민간인통제선이다.

황희선생은 개성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가깝고도

경치가 좋은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신 듯하지만...

87세까지 관직에 계셨고 90세에 돌아가셨으니

이곳에서 오래 지내셨다고는 볼 수 없다.

다만, 오래도록 사셨기에 장어가 유명한 곳이라 많이

드셔서 그렇다며 우스갯소리를 하였다...ㅎㅎ...

 

 앙지대에서 바라본 '반구정(伴鷗亭)이다.

임진강이 이곳에서 20리, 그러니까 약 8km를

흘러가면 서해 바다에 닿게 되는데 매일 조수(潮水)가

나가고 뭍이 드러나면 하얀 갈매기들이 가득 날아들어서

'갈매기를 벗 삼는 정자'라 이름 지었단다.

당시에는 철책이 없었으니 더 아름다웠으리라!

멀리 화살표가 있는 곳은 북쪽으로 이어지는 '자유의 다리'다.

 

 내려와 밑에서 바라본 반구정!

이밖에도 이곳에는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방촌영당'이 있으며 '기념관'에 전시자료들도 많았다.

 

 요번 기회에 황희선생에 대한 글을 여러 개 읽어보았는데

어려서 배웠던 청렴결백만의 황희정승은 아니어서 놀랍기도 했다.

읽었던 글을 참조해 보면(자세히 보니 파주에서 

참고자료에도 짧게 나와있었다.) 세종 10년 6월 25일

<세종실록>에 황금을 뇌물로 받은 사건을 계기로

'황금 대사헌'이란 별명이 붙었다 하며,
투옥된 사람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된 적이 있었고 살인 용의자인 여성을

자기 집에 숨겨주는 조건으로 수년간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세종실록>에 기록돼 있다나?

 또한 황희는 고려-조선 교체기에 조선왕조 건국을

반대하고 경기도 광덕산 두문동에 은거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을 탄생시켰고,

 

 태조 이성계 때는 훗날 이방원의 칼에 죽게 될

세자 이방석을 보좌하는 쪽을 택하였다 하며...

태종 이방원 때는 양녕대군을 지지하고 충녕대군

(훗날의 세종)을 반대하는 쪽에 섰다가 유배를 가기도 했단다.

이렇게 황희가 선택한 쪽은 항상 망했지만,

희한하게도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쪽에 의해 선택돼 

화려하게 부활했다는데, 그가 선택하지 않은

조선왕조가 그를 선택하고, 그가 선택하지 않은

이방원이 그를 선택하고, 그가 선택하지 않은

충녕대군이 그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럼, 황희가 선택하지 않았던 태종과 세종이

황희를 감싸주고 중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황희는 입이 무거워 주군의 비밀을 잘 지켜줬다 하며,

주군의 정치적 의지를 실현시켜 주되 주군을

위협하지 않고 성실히 보좌했다는 점과 사람들의

특성을 잘 읽어내어 커다란 정치적 흐름은

잘 읽지 못했지만 왕들이 보기에

매우 요긴한 인재였다는 점을 들었다.

 

 

 

  2014년   8월   4일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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