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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

날 기다렸을까

평산 2017. 10. 1. 12:42

 일 년에 세 번 정도는 茶를 갖고 나가 햇볕 쬐며 책 읽다 오는 날이 있다.

사과를 은종이에 싸고 비닐에 넣어 다른 날보다 일찍 길을 나섰다.

평소에 아무것도 들지 않으니 가방에 책도 넣었겠다 무거웠다.

똑같은 산책길로 접어들어 산마루에 올랐는데 못 보던 똘똘한 은행이 널려있어서...

주위를 넓게 두리 번하다 작은 샛길이 나 있는 밑으로 황금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왜 아무도 주워가지 않았을까?'

 '햇볕 쬐러 나왔는데 은행이 가로막네?...ㅎㅎ...'




 사과 넣었던 비닐을 얼른 빼어 줍기 시작했는데 봉다리가 커서 마음에 들었다.

마치 은행을 담으려고 가져온 듯했으니...ㅎㅎ...

이웃 작은 길로 접어들었을 뿐인데 은행이 생각보다 겁나게 많아 잘생긴 것만 주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고 뭐고 간편하게 올 것을 가방을 매달고 움직이려니 무겁고 땀이 났다.

작년까지만 해도 길에 남은 은행이 없었는데 내가 몰랐던 것처럼 모르는 것일까!

장갑이 있으면 좋았을 테지만 곰삭아서 냄새가 별로 나지 않았다.

그리고 거시기 냄새하고는 자연의 냄새라 분명 차이가 있다.

밟았을 경우라야 많이 나지...ㅎㅎ...


 무거워서 집으로 그냥 가야 할 지경이었으나...

이왕 준비해서 나왔으니 숲길을 돌지 않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넓은 곳으로 가야 모기가 없고 햇볕은 풍부하며 바람이 좋으니까 말이다.

기다란 의자 끝으로 은행을 놓고 다리를 뻗으며 모자와 양말도 벗었다.

이런 날은 햇볕 쬐려고 일부러 선크림을 바르지 않는다.


 앉아서 무심코 책 읽는 것도 행복이지만 눈 부신 가을이 보이질 않자,

이런 날 무슨 책이냐며 나무와 하늘과 노랑 들꽃을 응시하다 편안하게 눈 감고 있기도 했다.

 '혼자서 노는 달인'이란 소리를 듣는 만큼 이런 시간들이 갈수록 맘에 든다.

목이 따스함을 지나 따끔함이 느껴질 때쯤 모자를 쓰고 한참을 더 있다 짧은 길로 내려왔다.




 문이란 문은 활짝 열고 씻기 전에 작업을 시작했다.

은행껍질 버릴 비닐을 준비하고 그릇에 물을 담고서 싱크대에 은행을 쏟았다.

한꺼번에 주물러 은행 껍질을 없애려면 헹굼이 많고 냄새가 오죽하겠나!

 '머리를 써야지...ㅎㅎ...'


 가위로 은행의 옆구리를 살짝 집은 다음 알맹이를 쏙 빼어 물그릇으로 떨어뜨린다.

세 개쯤 잡고서 손놀림을 했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린 듯하다.

마침 바람이 센 편이어서 땀이 식으며 쓸쓸해지기 시작했는데 헹굼은 단지 몇 번으로 말끔해졌다.

신문지에다 펴서 물기를 뺀 다음 소쿠리에 담아 햇살에 바싹 마르면 냄새가 거의 없는데,

금세 저녁이 되었으니 다음날 하루 더 말려 보기좋게 마무리 하였다.

껍질 벗기기 전보다 무게는 삼분의 일로 줄어든 듯하였다.


 많이 씩 먹는 은행이 아니라서 겨우내 먹을 수 있을 양(量)으로...

우유팩에 익히는 것도 좋지만 망치로 톡톡 두드려 신문지에 돌돌 싸고 레인지에 1분 30초 돌리면?

옥처럼 초록빛을 띠며 훌륭한 보양식에 쫄깃쫄깃 맛난 간식이 된다.

하루 다섯 개쯤으로 만족하라는데 지킨 적 없으니 그것이 걱정이다...ㅎㅎ...

일하지 않은 者는 먹지도 말라 했거늘 넉넉한 인심에 어찌 보답해야 하나!

나 오길 기다렸을까, 가을에게 한 없는 고마움을 전한다.






 2017년 10월  1일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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