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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의 길>이란 일정으로, 젊은이들이 모여 창업했다는 여행에 참가하게 되었다

관광경영학과를 다니던 3~ 4학년 선 후배가 만나 '내포창조관광기반구축사업'이란 이름을 내걸고

일종의 관광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들은 홍성에서 '암행어사'란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작게는 충청남도의 예산, 홍성을 알리는데 주력하고 점차 우리나라 전반에 걸쳐 세력을 펼치려는 의욕에 보기 좋았다.




 '독립운동가의 길'이라니.....?

생소했지만 예산, 홍성 지방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앞장 서신 몇 분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를테면 윤봉길 의사와 김좌진 장군이 태어난 지역이며 근처에 한용운님의 生家도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다.

시골길을 지나다 갑자기 곳곳에 태극기가 보여 오랜만에 애국가를 들을 때처럼 뭉클함이 있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나셨으니 이곳에 生家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서울 양재동에도 윤봉길 기념관이 있고 해방이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일본에서 모셔와 새롭게 묻히신 곳이 효창공원이어서,

나라를 위해 커다란 일을 하신 분이라 교훈을 주려고 그랬나 도처에 흩어져 있음에 한편으로는 의문점도 생겼다.




 담장을 쭉 따라가니 '밝음을 연다'라는 뜻의 '啓明門(개명문)'이 나오고...




 들어서자 단정한 초가집이 보이는 넓은 광장에 믿음직한 은행나무가 노란빛을 발하고 있었다.

슬픈 역사의 애국지사(愛國志士)를 잠시 잊어버리고 막바지 단풍 구경에 다들 즐거워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말하기를 충청도에서 가장 좋은 곳은 내포지방으로...

(서산, 예산, 홍성, 태안, 당진 전 지역과 아산, 보령의 일부) 이들 지역은 가야산 일대에 자리하고

지세가 難을 피하기에 유리하며, 땅이 비옥하고, 평탄함은 물론 생선과 소금이 넉넉하다 하였는데,




 '어려운 한국을 건져낼 집'이란 뜻의'저한당''이라 불리는 이곳 또한 내포지방에 속하며...

윤봉길 의사가 부친을 따라 1911년 봄 4살 때 이사하여 1930년 만주로 망명할 때까지 사셨던 곳이다.

의사는 15세에 결혼하여 22세에 '丈夫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丈夫出家生不還)'라는

글을 써서 부모님과 아내와 두 아들을 뒤로하고 떠났으니 얼마나 신념이 굳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겠다.




 광장 오른쪽으로는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윤봉길 의사의 본관은 파평(坡平). 본명은 윤우의(尹禹儀)이며 호는 매헌(梅軒)으로...

만주로 건너간 뒤 1932년 봄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을 위해 몸과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그해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개최된 일본의 전승 축하 기념식에서 도시락폭탄을 단상에 던졌던 것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중국 국민당 장제스로부터 지원을 받아 항일운동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니,

요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저한당堂'에서 나와 다리를 건너면...




 '광현당(光顯堂)이라고 하여 윤봉길 의사가 태어나 4살까지 살았던 집이 나온다.

이곳은 사방이 냇물로 둘러져 있어서 왜놈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란 뜻의 '島中島'라 이름 지어진 곳으로,

그간에 보수를 했겠지만 당시 그대로의 규모와 초가를 유지하고 있는 듯하여 실체감(實體感)이 있었다.




 광현당 옆으로는 1929년에 '부흥원'을 설립해 문맹퇴치에 앞장서며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했던 곳이라는데,

주위가 제법 넓은 땅이어서 집안이 원래 부유하셨을까 했더니 당시에 몰락하던 양반집이었으며...

이런 공간을 지키기 위해 주위에 사시던 분들을 내보내고 만들어졌다고 한다.



 

 주차장으로 돌아와 윤봉길 의사의 사당인 '충의사'로 향했다.

난 사실 10년 전쯤에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 가서 도시락폭탄을 던진 지점에 서보기도 했다.

당시에 던진 것은 물통형 폭탄이었고 도시락은 윤의사가 자살하려는 목적의 폭탄이었다는데...

도착하기 전 가슴이 조마조마했으며 엄마와 함께 여행 중이라 설명해드렸더니 깜짝 놀라신 기억이 지나간다.

훙커우 공원은 번잡한 곳일까 했으나 조용하고 나무가 많았으며 새소리가 싱그러웠던 곳이다.



 

 '충의사'에 도착하여 향을 사르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의 묵념을 드렸다.

무리 지어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도 힘든 일인데 홀로 목숨을 내놓으며 맞선다는 것이 상상이라도 가능한 일인가!

내 가족 먹여살리기도 힘든 시절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다니 보통은 넘는 분임에 틀림없음이라!




 들어갈 때는 못 봤으나 나올 때 홍살문을 발견하였다.

왕의 무덤에서나 본 기억이라 찾아봤더니 경의(敬意)를 표하라는 뜻이 포함된 듯하다.

 내가 태어난 곳도 예산이어서 요번 여행은 설렘 자체였는데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고장이어서 뿌듯했으며,

친정엄마께 예산에 다녀왔다는 소식과 상하이에서 들려드린 도시락폭탄 이야기 기억나시냐고 했더니?

그 사람이 고향 사람이었냐며 또 한번 놀라셨다...^^*


 




 2017년  11월  13일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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