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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흑룡강성에서 사회장(1930)을 치른지 4년 만에 부인이 만주로 가서 상자에 유해를 위장하여,

홍성에서 밀매가 이루어졌고 1957년 김두한에 의해 보령군 청소면에 이장되셨다는데...

 

 

 

 

 장군의 生家에 방문해보니 집터도 넓고 한눈에 봐도 부자셨구나 싶은 것이 왜 보령에 모셨을까?

뒤에는 얕은 산이 바람을 막아주고 앞에는 와룡천이 집을 휘돌아 나가며 햇살 풍부하고

시원한 구조로 풍수지리를 모르지만 이곳 홍성이 명당으로 보였는데 말이다.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본관은 안동.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시다.

일제강점기의 군인이자 독립운동가로 3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부유한 명문 출신으로...

16세 때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土地를 소작인에게 분배하였으며 혼인도 하였다.

행랑채의 한 칸쯤 되는 공간이 대문으로 나있었으며 대문 오른 편으로 이어진 곳에는...

 

 

 

 

 마구간과 그에 해당하는 연장들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무사(武士)라 발 빠르게 움직이기 위함이었을까!

장군은 서당 공부에 잠시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다녔을 뿐 정규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90여 칸이나 되었던 집을 학교 교사로 내어주고 초가집으로 나가 산 일이 있을 만큼

교육에 관심을 두었다. 실제로 생가에서 북쪽으로 1km쯤 떨어진 홍성 갈산고등학교의

부지 일부가 아직도 포함되었다 하며, 흑룡강 해림시에 있는 조선족 실험소학교는

지금까지 장군이 설립한 20여 개의 학교 중 한글을 가르치는 유일한 학교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 집은 그러니까 1889년 11월 14일 김좌진 장군의 출생부터 결혼 후 1905년

16세 때까지 생활한 곳이며, 안채와 오른쪽 끝의 계단을 오르면 사랑채가

붙어있는 모습의 가옥이었다.

 

 

           

 

 

 마루에는 '청백전가팔백년(淸白傳家八百年)'

청백리의 집안으로 팔백 년을 이어왔다는 뜻의 액자가 보여주듯...

일생을 교육사업과 나라 구하기에 받친 분으로 짧게(41세) 사셨지만

몸담은 조직이 많아 표를 그대로 옮겨본다.

 

 

 

 

 

 교육이나 언론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며 북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고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1911~1913)를 하기도 했는데...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신 만큼 청산리란 어떤 곳이었나 살펴보았더니,

조선인 교민이 많이 사는 북간도의 연길과 용정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사방으로 산세가 험하고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독립군이 운집하고 활동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첫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청산리 백운평 부근 골짜기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일본군 토벌 연대 사이에 시작되었는데

6일간 10여 차례에 걸쳐 일본군 3300여 명의 사상자를 내였다.

봉오동전투로 이름난 홍범도 장군과 독립군 병사들의 영웅적 분전,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지휘관들의 우수한 유격작전,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와 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룩된 승리였다.

 

 

 

 

집을 구경하고 위로 올라 사당으로 향했더니 소년 시절부터 동상이 차례로 세워져 있었다.

 

 

 

 

 1929년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간에

갈등이 격화되었고 1930년 1월 24일 장군이 생계로 운영하였던 정미소 앞에서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인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는데, 이 암살사건은 독립투쟁 노선에서

빚어진 이견과 오해에서 동포의 분열상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란 말을 남기셨다는데...

 

 

 

 

 조국 광복은 멀고 이때가 갓 마흔을 넘기신 때라 편안하게 눈을 못 감으셨을 것이다.

生家가 궁금하지 祠堂은 어떤 모습일까 관심이 덜 가지만 막상 와보니

'白冶祠(백야사)'가 더 반갑고 뜻깊은 곳이었다. 청산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대대적인 양민학살 작전을 펼쳐 연길과 용정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

간도 동포들뿐 아니라 연해주까지 살인과 방화행위를 일삼으며 보복하였는데 

이를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한다.

 

 

 

 

 후손이 어떻게 되셨을까 찾아보니 본 부인에게서는 자손이 없었고 2남 1녀가 있었다.

김두한은 첫째 아들로 부인을 넷이나 두는 바람에(각각 자손이 있었음) 후손들은 많을 듯하였다.^^

 

 

 

 

 이곳 역시 홍살문이 있었으며 내려다보는 경치가 좋았다.

 예전에 꼬마들과 여러 번 유관순과 3,1운동을 이야기하며 밖으로 나가면

일본 순사가 총을 마구 쏘는데 태극기를 들고 만세 부르러 나갈 수 있겠냐고 물으니

나가겠다는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나 또한 망설였을 것이고, 어렵게 이룩한

대한민국이라 나라를 지켜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내려놓는다.

 

 

 

 

  2017년  11월  18일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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