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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신문을 자세히 읽어보는 덕에 행운이 찾아왔다.

다름 아닌 간송 전형필에 대해서 자세히 알 기회가 생긴 것이다.

성북동과 가까운 곳에 살지만 '간송미술관'을 가 본 적이 없는데...

새롭게 탄생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6월 15일까지 '간송 문화전'이 열리고 있어 찾아간다고 하며...

간송의 전기문를 쓰신 작가가 며칠 동안 함께 하시어 직접 설명해주신다니 얼마나 영광스런 일이겠는가!

 

 

 

 위의 글에서 '그들의 우정과 사랑으로 우리의 문화재를 지켜내다'란 말이 있듯이...

그들이란? 많은 분들이 있었겠지만 그중에서도...

1, 간송에게 문화재를 식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가르치신 당대의 감식안이자 수집자였던 위창 오세창,

2, 간송의 제자로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린 제4대 국립박물관장인 혜곡 최순우...

3, 그의 이종 사촌형으로 어려서부터 우리나라 역사와 민족의식을 가르친 역사소설의 선구자 월탄 박종화,

4, 우리나라의 서양화가 1호로 간송의 고등학교 때 미술선생이셨던 春谷 고희동....등이 대표적이었다.

 

 참고: 간송이란 아호는 스승인 오세창이 깊은 산속에서 흐르는 물 '간(澗)자와...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

즉,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문장에서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소나무송(松)자를 따와 이름 지어 주셨다한다.

 

 

 

 간송미술관에서 가까운 '최순우 옛집'을 거닐며 설명이 이어졌다.

 

 간송이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 3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물려주신 재산은 오늘 날 강남 아파트 1000채에 해당 된단다.

그런데 큰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며 자손이 없자 큰집 재산도 모조리 물려받아 총 2000채의 부자가 되었으며,

한해 수입은 요즘으로 쳐서 약 450억 정도였다는데...

당시의 경기북부에서 황해도에 이르는 길은 간송네 땅을 밟지 않으면 못 지나갔을 정도였다니,

만 석 이상의 재산을 가진 조선인이 43명 있었다니까 2만석을 갖고 있었던 셈이라 얼만큼 부자인지를 알 수 있다.

 

 

 

 마당에 피어있는 꽃!

 

 지금이야 서울이지만 황해도로 가는 도중인 지금의 도봉구 방학동에는,

대규모 농장 및 경기북부와 황해도에서 오는 소출을 관리하는 근거지가 있었다는데...

그곳을 직접 찾아가 보니, 예전에 친구와 지나며 마을에 이런 무덤들이 있네? 부잣집 선산인가봐? 했었던 곳으로,

간송이 사시던 전통가옥과 묘지를 보수하여 공원화하는 공사가 시작 되고 있었다.

 

 

 

 최순우 옛집의 뒤뜰 모습!

설명해주시는 분이 간송 전기문을 쓰신 이충렬 선생님이시다.

1950년 6, 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간송미술관에도 북한군이 들이닥쳐 국보급 문화재들을 빼앗길 위기를 맞았는데,

포장할 사람으로 불려온 최순우와 수집가이자 서예사인 손재형이 일부러 문화재를 종이에 쌌다가 풀었다가...

무엇을 사와야 한다, 무엇이 부족하다를 줄곧 외치며 포장지연작전으로 위기를 극복했단다.

허나, 1.4 후퇴 때에는 주요 소장품은 부산으로 옮겼지만 미처 피난 보내지 못한 소장품들은 대부분 도난당했다한다.

 

 참고: 서울 암사동 선사시대유적지에서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인 기원전 3000년이라는 절대연도를 가진...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됨에 따라 우리나라 미술역사가 2000년에서 5000년이라고 공식발표한 분이 최순우였으며...

1975년에 이 발표가 나오자 일본이 깜짝 놀라 순회 전을 요청하였고 성공리에 끝나자 미국의 8개 도시...영국, 프랑스, 유럽등...

이때부터 한국의 국보는 세계 최고 수준의 대접을 받게 되었으며 최순우는 우리문화를 알린 분으로 전해진다.

 

 

 

 원서동에 있는 고희동 가옥도 찾아보았다.

서울 북촌과 이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사람들이 바라다보는 건너편이 창덕궁으로 역사가 있는 동네로 느껴졌다.

종로길 바로 뒤이니 시끄러울 듯했지만 우리일행과 찾아오는 이들이 더러 있었을 뿐 조용했으며...

이 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이 1918년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직접 설계해서 지은 목조 한옥으로,

작업실이 있어야해서 그런가 미로형으로 보였으며 꾸며지지 않은 마당이었지만 자연스럽고 시원함이 있었다.

 

 

 

 처음에는 서양미술을 했으나 동양화로 바뀌셨단다.

고희동은 간송이 휘문고등학교 다닐 때 미술선생님이셨으며 스승 오세창을 소개시켜 주신 분이다.

오세창은 간송보다 무려 마흔 살이나 차이가 나시는 분이셨음에도 그들의 우정은 빛이 난 것이다.

 

 

 

 겨울에는 추웠겠지만 정갈하고 아름다웠으며 사랑방격인 곳을 지나니.....

당시에 찍은 사진들이 여러 장 걸려 있었는데......?

 

 

 

 간송미술관 (보화각) 상량식(집을 지을 때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은 다음 마룻대를 올리는 의식)을 마치고 찍은 사진이란다.

왼쪽부터 이상범, 박종화, 고희동, 안종원, 오세창, 전형필, 박종목, 노수현, 이순황

여름날이었는지 수박들 드시고 커피(?) 도 한잔씩 하셨을까요?....ㅎㅎ

그러니까 이분들의 우정과 사랑으로 일테면 우리문화재가 지켜지고 알려진 것이다.

다음 장에는 괴물 같다, 멋지다, 이상하게 설계했다고 말들이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가보자!

 

 

 

2014년  6월 13일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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