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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은 지붕 없는 박물관이란다.
볼거리가 그만큼 많아서 그럴 것이다.
한성대 입구역에서 오전 10시에 만났는데 살구가 노랗게 달린 나무 아래서였다.
여러 번 지나다뎠던 길에 장승업이 살았다 해서 놀라고...
구불구불 좁다란 골목으로 들어가 채동선 집을 찾았다.
예술인 집이라 그런지 담벼락 밑 기와에 그림이 그려져있어 보기 좋았다.
미술가는 아니고 고등학교 다닐 때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는데...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지만 바이올린을 계속 공부하다 독일로 건너가 음악 공부를 이어서 한 뒤
1929년에 귀국하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지용의 시 '향수'를 작곡하신 분이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고 갔다가 아하~~ 그분이로구나? 반가웠다.
오는 사람마다 집안이 궁금했던지 담 밑에 벽돌 3장이 쌓아있어서 올라갔는데 현재 비어있었으며
마당이 넓고 아늑한 집이었다.
해방 전만 해도 ‘산성 북쪽 동네’인 성북동은 교통이 불편하고 집 뒤뜰로 꿩이며 늑대들이 가끔씩 내려오는 곳으로,
이곳의 일부가 서민들의 주택 단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초반의 일이라는데...
골목 왼쪽의 노란 집이 시인 김광섭이 살던 터라 하여 계속해서 유명하신 분들이라 마음이 들뜨기도 했다.
1969년에 발표한 '성북동 비둘기'를 소곤소곤 우리 중 한 분이 낭송하니 당시의 어수선함이 전해져오며,
비둘기의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언덕길을 올라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작가 염상섭의 옛집 앞에 섰다.
당시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잘 사는 사람이었나 이집 또한 웅장했다...ㅎㅎ
안으로 들어가 유품이라도 봤으면 좋겠지만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대부분 밖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어 아쉬웠다.
1921년 '개벽'에 실렸다 하며 한국 현대 소설의 개척자인 염상섭은 1963년 성북동에서 돌아가셨다는데...
이 집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넓은 찻길을 건너 윤이상이 살았다던 골목을 지나 최순우 옛집에 도착하였다.
미술사학자로 제4대 중앙박물관장을 지내시고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의 저자가 사시던 곳이다.
세 번 정도 다녀간 곳이라 익숙했는데 벽에는 기금을 낸 분들이 새롭게 적혀있었다.
6·25사변 중 생명을 걸고 소장 문화재를 부산으로 안전하게 운반하신 분이니 책임감에 얼마나 심장 떨리셨을까?
마당에 작은 연못과 우물이 있으며 함박꽃 씨가 한참 여물어가고 있었다.
뒤뜰로 가보면 붉은 벽돌담 앞의 장독대와 여럿이 담소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었고...
이곳을 아끼는 분들이 번갈아가며 언제든 대문을 활짝 열어놓아 기분 좋은 곳이다.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시민들에 의해 지켜진 시민문화유산 1호라 의미 있는 집이다.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이라 하여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산 기증과 기부를 통하여 보존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보호하자는 취지의 운동으로 첫 번째로 지켜진 자랑스러운 곳이다.
다시 넓은 길로 나와 조지훈의 집터가 있던 곳을 지났다.
일행들이 서 있는 곳에 조지훈의 '승무'가 새겨져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옆이 과일가게였는데,
길을 넓히려 했을까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조지훈은 1939~ 40년에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로 문단에 올랐으며,
'승무'라는 詩를 배운 후 한국무용발표회에서 직접 승무 춤을 대했을 때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한다.
특히 종종걸음으로 무대 끝을 향하여 동그란 조명과 함께 이동하다 살포시 들어 올리는
외씨버선의 절제미(節制美)에 아~ 하고 탄성이 나왔었다. 우리끼리 자그맣게 낭송을 즐기고...
다시 몇 분을 걷자 1만 원권 지폐 세종대왕을 그리신 김기창 화백의 미술관에 도착하였다.
사시던 집터에 미술관을 지었다 하나 재정난(財政難)으로 문을 닫았다 해서 당황스러웠다.
1913년 서울에서 태어나 7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장애자가 되어 아버지는 목수를 시키려 했지만
그림에 소질이 있음을 어머니가 발견하시고 김은호 화백에게 동양화를 배우기 시작했단다.
노후에 청주로 내려가 작품활동을 하셨으니 성북동 미술관은 그 후로 소홀해진 듯하였다.
그 옛날 심었던 뽕나무가 한창 푸르른 모습을 해설사님의 설명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선잠제란 조선시대에 비단의 원료인 누에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말하는데,
왕비가 매년 3월에 제사를 지내던 ‘선잠단(先蠶壇)’이 바로 성북동에 있다.
마침 공사 중이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선잠단 주위에 남아 있는 뽕나무를 만난 것인데
당시에 심어진 것이라 생각하니 보석을 만난 듯 기뻤다.
대신 언제 생겼는지 근처의 선잠 박물관을 구경하였다. (찾아보니 2018년 4월에 개관했다네!)
누에고치에서 나온 실을 상징했을까 박물관 겉모습이 커튼을 친 듯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백성들이 무명으로 옷을 지어 추운 겨울에는 솜을 넣고 누벼서 입었으나 그럼에도 어설퍼서
따뜻한 비단 옷감을 장려하였다는데...
양반들이나 입었지 서민들까지 돌아갔을까 싶었다.
색색의 비단 옷감에 비단 실로 만든 노리개도 전시되어 있었고 선잠제를 지내는 모형도 만들어져 있었다.
비단은 언제 봐도 촌스럽지 않고 곱다!
왕비가 손수 누에치기의 모범을 보여 양잠을 장려하기 위한 의식을 친잠례(親蠶禮)라 하는데,
성종 8년(1477년)에 처음 시행되었다 한다. 뒤에 보이는 산은 언뜻 보아도 오늘날 청와대 뒤편의 북악산과 닮아
친잠례 의식을 행했던 곳이 경복궁 안일 듯 혼자 추측해보았다...^^
선잠 박물관에서 나와 조금 올라갔더니 간송미술관이 나왔다.
마음에 준비도 없이 말로만 들었던 어마어마한 곳이라 속으로 깜짝 놀랐다.
문인들의 옛집이나 성북동의 볼만한 곳을 찾아간다는 사실만 알고 따라다니다 느닷없이 만난 것이다.
미인도(美人圖)를 구경하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골목에 줄을 섰었나 방송에서나 봤는데,
그 대열에 끼지 않았음이 부끄럽진 않았으나 궁금하여도 혼자 오기 벅차더니 바로 이곳이었구나!
대문은 그냥 열려있었고 창고 비슷한 곳을 지나 본 건물이 보였는데...
현재 전형필의 자손들이 살고 있다 하며 매년 봄 가을에 전시회를 무료로 해왔으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생긴 이후로는 전시회를 그곳에서 한다고 알고 있다.
건물 안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있을 텐데 겉으로 보기에는 소박하였다.
안으로 안내되면 영광이겠지만 문화재를 지키려면 오는 사람마다 그럴 수 없음을 이해해야지 어쩌겠는가!
여기까지만 봐도 성북동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할만했는데 다음은 어디를 갔을까!
2018년 7월 3일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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