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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교회 언덕으로 올라가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종석(1875~1592) 별장이 덕수교회 뒤쪽 막다른 골목에 있었다.

대문 앞에 우물이 보였는데 예전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축소되어...




 들어서면 왼쪽으로 행랑채가 있었고 바로 안채와 사랑채를 겸한 본채가 나왔다.

1875년(고종 12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종석은 새우젓 장사로 부자가 되었다 해서 신분사회라 호기심이 일었는데,

한강에서 목재와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양곡, 해산물로 당시에 마포에서 가장 많은 범선을 가졌다 하며

개천에서 용이 아닌 원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말에 급히 실망되었다...^^

 



 회색 벽돌로 이루어진 담은 십자(+) 모양으로 바람구멍을 낸 모습이었다.

구슬이 울리는 소리가 날 듯한 꽃문양의 담이란 뜻의 '영롱담'이라 한다.

사는 집은 마포에 있었으며 담을 보고 여름 별장이라 이름 지었다는데...

밖이 보여 시원하면서도 화려했으나 겨울에는 찬바람이 불겠더란다.




 안채와 사랑채를 겸하고 있는 본채는 궁궐 건물처럼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놓았는데 건물의 규모나 형식이 궁궐 건물과 비슷하였다.

정자(亭子)의 역할을 하는 누각과 창살, 처마만 들여다보아도 정성을 들인 집이었다.

하물며 꽃밭과도 잘 어울렸다.


 


 일제강점기에 이곳 일관정에서 이태준, 정지용, 이효석, 이은상 등 문학인들이 자주 모였다고 한다.

대림산업 이재준 가로 넘어갔다가 1985년 덕수교회에서 매입했으며 서울 민속자료 제10호로,

정원을 가꾸는데 연 2000만 원,  3년마다 창틀 청소하는데 1500만 원이 들어간다 해서 놀라웠다.




  안채 건물 뒤편에는 장독대와 궁궐에서 볼 수 있었던 높다란 굴뚝이 서있었고,

장독대 항아리에는 교인들이 정성스레 담근 장들로 채워져 있단다.




 대문에서 왼쪽에 있던 행랑채는 별장을 지키기 위해 살림을 했던 집으로...

혹시 나에게 지켜달라고 하면 영광이라 여기고 행랑채에 알맞은 살림을 꾸려 이사 가야겠다.

마당도 넓게 사용하고 청소한답시고 안채에 들어가 가끔 오는 주인보다 더 누리고 살 것이다...ㅎㅎ

미리 돌쇠 편에 연락이 오겠지만 갑자기 들이닥쳐도 여름이니 삼계탕이나 한 솥 끓이고 있으면 되겠지!


바닥에는 네모난 디딤돌로 비가 와도 걸어 다닐 수 있게 해놓았는데 전체적으로 말끔하였다.





 별장에서 내려오니 성북구립미술관이 보였다.

이곳도 간송미술관만큼 궁금했던 터라 오게 되어 기뻤다.




 마침 '정릉시대전'이 열리고 있어 정릉천을 중심으로 성북동만큼  많은 예술가들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같은 색의 동그라미로 묶어 이야기하자면, 노란색 박고석의 집에는 화가와 문인들이 자주 모였고...

그중 이중섭은 삶의 마지막을 정릉에서 보내다 병원으로 향했다 하며,

프랑스로 떠나기 전 추상화가 한묵도 이중섭과 시간을 함께 했단다.


 하얀색의 소설가 박화성은 연배가 비슷한 박경리의 어머니와 친한 이웃으로 지냈다 전해지고,

여성 예술가들과 동향 작가들을 이끌어 차범석이 정릉에 정착하게 만들었단다.

 

 꽃 자줏빛 '그네'의 작곡자 금수현과 자전거 (따르릉따르릉 비켜나셔요~ ♬)를 작곡한 김대현은 국악을 현대화하는데 앞장서서

한국의 음악을 발전시키고, 이중섭의 그림이 담긴 詩에서 영감을 얻은 금수현은 '꽃으로 그린 그림'을 작곡했다는데,

금수현의 둘째 아들이 금난새였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어 즐거웠다.^^




 작품 하나하나를 자세히 봤지만 이중섭의 자서전을 읽은 후라 그의 손글씨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예술가의 가난이여, 처절한 그리움이여~~~!




 미술관 바로 위쪽에는 '수연산방'이 길가에 있었음에도 조용해서 지나칠 뻔하였다.

월북 작가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까지 살았던 집으로 현재 증손녀가 찻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써도 편안하니 훌륭했다. 




 고택이라 지긋하신 분들이 앉아계실까 싶었지만 젊은이들로 가득하였다.

이태준은 이 집에서 '황진이' '달밤' '돌다리' 등을 지필 하였으며 언뜻 이종석 별장과 닮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수연산방은 이태준이 지은 당호로 '문인들이 모이는 산속의 집'이란 뜻이다.





  이번에는 만해 한용운이 옥고를 치른 후 머물렀던 심우장에 가보자!

심우장은 한용운이 1933~1944년까지 사셨던 곳으로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이란다.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 되어 반대편 산비탈을 집터로 선택했다는데,

몇 년 전하고 아주 다른 모습이어서 그동안 부분 개발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집들이 낡고 허름한 골목을 올라야 심우장이 나온다.

전체적으로 재개발을 하자니 한옥 보존지역도 있어서 집집마다 개성을 살려 개발 중이라고 한다.

 '심우장'이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다는데,

 '심우'란 소를 키운다는 뜻으로 잃어버린 나를 찾자는 의미였다.




 이런 지대에서 집이 남쪽을 바라보려면 사람이 올라가는 쪽으로 돌아서야 하는데...

성북동의 마을을 내려다보려면 안정감 있는 북향일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그대로의 방향으로...


 


  건물 한 채가 보이며 왼쪽 현판 심우장(尋牛莊) 은 오세창이 썼다고 한다.

만해가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승려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몇몇 유지들이 힘을 합쳐 땅을 조금 더 넓혀지었다 한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 마당이 넓어진 듯하여 당시에 자세히 보질 못 했나 아니면 더 확장을 했을까?

건물도 허름했었는데 윤기가 흐르고 사뭇 분위기가 활기차 있어 보기 좋았다.


 


 대문도 확실히 커지고 나무들도 많이 자라 있었다.

성북동이 내려다보이니 그런대로 방향이 좋은 듯했는데 이 집만 북향일까?

중앙에 서있는 나무가 한용운이 심었다는 향나무이고 당시에 못 봤던 소나무가 늠름해서 마치 홀린 듯했다.

1934년 첫 장편소설인 『흑풍(黑風)』을 이곳에서 집필하여『조선일보』에 연재하셨단다.





 뒷모습은 굴뚝만 보이고 단출했는데 마루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방이 있는 형태로,

광복을 못 보고 1944년(향년 65세)에 돌아가셔서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이곳저곳 돌아보는 기쁨에 뜨거운 줄도 몰랐다가  집에 와보니 얼굴이 벌겋게 익어서 에구에구~~ ㅎㅎ

모자를 써도 더웠어서 이럴 땐 양산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으며...

여름 동안 쉬었다 가을이 오면 서울에서 문화재가 가장 많다는 종로구에 진출해봐야겠다.

비용은 무료이며 해설사님의 등장에 오전 10시에 출발하여 12시가 넘으면 일정이 끝나니 참고하세요!

구청 홈페이지에서... 문화관광을 찾아... 골목길 여행 신청하시면 됩니다..^^*





 2018년  7월  8일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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