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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역 6번 출구에서 만나 이동하였다.

궁금한 곳이 있으면 가보고 싶어 기다려진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건너와 2년간 살았던 돈암장(敦巖莊)이다.

조선시대에는 빈민들을 위한 의료기관인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있었던 곳이고,

일제시대에는 평산목장(平山牧場)이 들어서 젖소 등을 기른 목장이었다.

2004년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91호로 지정되었으며...

이승만이 머물렀던 곳은 한옥과 양옥으로 구성된 돈암장에서도 담 너머로 보이는 서양식 건물이었다.




 현재 공사 중인 부분은 돈암장의 한옥으로 빨간 벽돌 건물이 시작되는 곳까지 쭉 이어진다.

1945년 10월 망명길에 오른지 34년 만에 이승만은 맥아더 전용기를 타고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으며,

호텔에는 미 군정 요인들이 다수 투숙하였고 하루에 300~600명의 사람들이 이승만을 만나려고 몰려들었기에

여러 가지 민폐와 많은 경비 때문에 이곳 돈암장으로 옮겼다 하며 담이 높아 볼 수 없어 답답하였다.




 공사를 하고 있는 곳을 지나면 이런 한옥으로 마무리된다.

이승만에게 집의 중요한 부분을 내어주고 가장자리인 이곳에서 조선타이어주식회사 사장 장진섭이 살았다.

광산업으로 부자가 된 그는 자신의 사업을 번창시키는데 미국에서 온 이승만이 도움될까 싶어 집을 내주었지만,

아무런 혜택이 없자 2년 만에 이승만이 살던 방에다 자신의 짐을 옮기면서까지 집을 비우라고 통보했단다.




 활인서는 조선 초기에 전염병 환자와 가난한 환자를 치료하려고 서울의 동, 서 두 곳에 있었던 관청으로,

동활인서터(東活人署터)가 구체적으로 어디였는지 해설하시는 분이 좀 더 자세히 보여주시겠다고...

언덕을 올라 그나마 시원하게 구경할 수 있어 기뻤다.



  
 그러니까 조선 초기에 활인서가 있었던 곳은 지금의 교회가 서있는 자리였으며.

돈암장은 교회가 있었던 부지에다 바로 앞 이승만이 머물렀다는 서양식 건물과 멋스러운 기와집,

그리고 집주인 장진섭이 살았던 한옥까지 더하여 700여 평의 정원을 갖춘 꽤 넓은 곳이었다.



  
  1938~1939년에 지은 한옥은 당대 최고의 대목장(大木匠)이던 배희한(裵喜漢·1907~1997)이 지었단다.

무형문화재 74호였던 배희한씨는 생전에 “돈암장을 지을 때 쇠못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나무를 짜서 지었으며,

서까래와 내실 기둥 등은 모두 백양목을 사용했다”고 증언했다는데 당초 이 건물을 지은 주인은 내시였다고 한다.


 서양식 건물에서 이승만이 거처했던 만큼 이곳 한옥에서는 윤치영(尹致暎 : 비서실장) 이기붕(李起鵬 : 서무담당)

윤석오(尹錫五 : 문서담당) 송필만(宋必滿 : 비서) 등이 보필하였고, 와병 중에는 임영신(任永信)이 간병했으며,

드라마 '야인시대'의 촬영장소 였다는데 지금은 필지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사전인 공간임으로 공개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이승만의 거처변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호텔(1945. 10. 16 귀국) → 돈암장(1945. 10월말~1947. 8. 25) → 마포장(~1947. 10. 18)

→ 이화장(~1948. 8. 22) →경무대(~1960. 4. 28) → 이화장(~1960. 5. 29) → 하와이 망명


 



 2018년  7월  30일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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