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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소나기

평산 2023. 8. 23. 14:23

 우산을 들고 갈까 서쪽 하늘을 바라보니 

무거울 것 같아 그냥 나갔다. 비가 와도 안전한 곳은

운동장이지만 평지는 역시 걷는 재미가 덜해서 숲으로

들어갔다. 여차하면 가까운 정자(亭子)로 피할 수 있어도

둘레길을 한 바퀴 돌려면 정자에서 멀어지는 구간이 있는데

비가 몇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방향을 바꿀까...

그냥 앞으로 향할까 마음속은 생각 중이었어도 

발은 앞으로 향하고 있어 걸어가며 기도를 했다.

 '정자까지 가는데 2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조금만 참아주시면 최대한 빨리 움직이겠습니다.'

 

 

 

 처음에는 기도가 효력을 발휘하나 싶었는데

정자에 도착하기 5분 전쯤 후드득하다가 쏴아!

걷다가 급해져 달리기 시작했다. 모자를 써서 그나마

덜 젖었는데 이미 정자 주변에는 아저씨 두 분이 서 있었고

연세 있으신 부부가 정자로 오르는 계단에 앉아 계셨다.

 

 신발을 벗는 곳이라 벗은 신발을 들고 정자로 올라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위치가 높아 바람이 살랑 불어

붉어진 얼굴을 식혀주었다. 숲 속에 오면 정자에 앉는

경우가 없었는데 이럴 때 참 요긴하게 쓰이는구나!

잠시 뒤 여인 3명이 옆으로 쪼르르 앉았다.

 

 그녀들 이야기를 옆에서 들으며 솔깃해졌다.

비슷한 또래일 듯했는데 아이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만나기 시작해 세월이 흘렀지만 강원도로 이사를 가서 

이제 돌아온 이가 있어 오랜만에 만났단다.

 

 2000평이 넘는 곳에 도라지꽃 핀 광경 이야기!

성악을 전공했다는 음악선생님 이야기!

작은 공책을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시간을 잘 쓴다는 의미에서 보기 좋았다.

유치원 교사였다는 여인은...

 "자, 하루 중 가장 피곤한 오후 4시입니다. 귀를

만져줍시다. 이리저리 마사지하시고 위쪽 귀를 반으로

접어주세요, 가운데 평평한 곳이 심장입니다.

꼭꼭 눌러 주세요!" 나도 열심히 따라 했더니 

한 팀인 듯 서로 얼굴 바라보며 웃었다.^^

 

 비가 그치고 햇살이 반짝 나와 주위 사람들은 

자리를 떴는데 세 여인이야 오랜만에 만나 그랬겠지만

집에 갈 생각 없이 이야기 들으며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보통 아줌마들답지 않게 언성이 높지 않고

잔잔하니 건설적인 이야기들이라 배워야겠구나 싶었다.

 

 "햇볕이 반짝 나와 숲이 찬란하네요."

듣고만 있던 내가 한 마디 했더니 찬란하다는 말이 보통을

넘는다며 혹시 시인이냐고 묻는다. 별말씀을요...ㅎㅎ

어떤 시어머님은 저녁거리로 냉면 사오라 전화를 하셨고

30분만 있다가 일어나자는 말에 나도 그러겠다고 하여

더 앉아 있다가 왔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헤어지기가 어째 섭섭하기까지 했다.

소나기가 잠시 맺어준 인연이었다.^^

 

 

 

 

  2023년 8월  23일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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