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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읽고난후

김승옥의 무진기행

평산 2021. 1. 25. 16:27

 

 

 무진으로 향하고 있다.

며칠 쉬다 오면 주주총회를 통해 전무로

발령되게끔 조치를 취하겠으니 잠시 다녀오라는

아내의 말에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무진의 특산물은 무엇일까 의문을

갖는 이들이 있어 주인공은 안개를 떠올린다.

 

 마음이 심란할 때나 한적함이 그리울 때,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 시점에 오게 되는 무진인데

그렇다고 용기나 새로운 계획이 나오는 무진도 아니었다.

고향에 오면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백처럼 안개가 주는 희미한 배경 때문일까!

골방에서의 공상이나 불면을 쫓아내려는 수음 

독한 담배꽁초 등 분위기가 대체로 어두웠다.

 

 제약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다 좀 더 큰 다른 회사와

합병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었고 동거하고 있던

희(姬)만 곁에 있었으면 무진행은 없었을 텐데 

희(姬)가 달아날 무렵 지금 아내의 전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제약회사 딸과 결혼하게 됨에 고향에서는

제법 출세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모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후배 박 선생과 

고등고시 출신으로 우쭐한 세무서장인 동기생 조씨,

같은 학교에서 음악 선생으로 있는 소프라노 하선생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는데 이들은 하선생을 사이에

두고 희미한 삼각관계에 있는 듯하였다.

 

 박 선생은 음악 선생을 좋아하면서도 소극적이며 수줍어 

연애편지를 보내게 되면 하선생은 편지를 들고 쪼르륵

조씨를 찾아가 보여주는 사이로 얼핏 조 씨에게

기우는 느낌이었지만 조 씨는 나름 지방에서 출세한

입장이라 거들먹거리며 여러 여인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조씨 집에서 나와 하선생과 같은 방향으로 걷던 중

헤어질 지점에서 무섭다며 그녀가 바래다 달라는 말에 

주인공은 하선생이 그의 생애 속에 끼어들었다는

생각과 앞으로 오빠라 부르겠다는 그녀와 다음날

오후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는데 그날 밤,

안타까운 음성으로 서울로 데려가 달라는 그녀를

떠올리며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한다.

 

 솔직한 것일까

아니면 본능에 충실한 모습인가!

고작 며칠 내려온 고향땅에서 소문이 무섭지 않았나.

조심보다야 욕심을 채우고 싶었을까!

껴안고 싶다 정욕이 끓어올랐다는 암시가 있더니

'그 여자가 처녀는 아니었다.'

이 대목에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점잖은 신사의 모습과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그녀의 조바심을 빼앗으며 그 순간 처녀다 아니다의

여유 있는 분별에 괘심 하고 씁쓸했다 할까?

 

 자기 자신이 싫어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냐며

일부러 꾸민 명랑한 목소리로 어제와는 달리

서울에 가고 싶지 않다고 여인은 말했다.

조신하지 않았음을 들킨 듯 스스로를 얼핏

돌아봤을 것이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 일주일

동안만 멋진 연애를 하겠단다.

 

 하지만 서울에서 전보가 왔다.

이틀 후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며 급상경하라는

소식으로 아내의 전보는 무진에 와서 한 행동과

사고를 명료하게 드러내 주는 것 같았으며 순전히 

여행자에게 주어진 자유 때문이었다 혹은 세월에

의하여 잊힐 수 있다는 자기 합리화를 늘어놓고

이번을 마지막으로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며

앞으로는 주어진 책임 속에서만 살겠다 다짐하나,

 

 돌아서자마자 음악 선생에게 편지를 쓴다.

예전에 어렴풋이나마 사랑했던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녀의 모습이라 사랑한다며 서울에 가서

준비를 할 테니 연락하면 즉시 오길 바란다는...

옛날의 자신을 오늘날의 자신으로 끌어놓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할 것이며 행복할 수 있을 거라나?

 

 일종의 허세로 보였다.

처가로 인해 누릴 것은 모조리 누려야겠고 

비밀스러운 생활도 하고 싶은...

지극히 세속적인 바람이랄까.

읽어보고 또 읽어보고서야 편지를 찢고는

버스에 올라 무진을 벗어나며

심한 부끄러움으로 서울로 향한다.

 

 그 시절 무진기행을 앞에 두고 다 읽지 못했다.

안개에 답답함이 일어 일찍 덮었던 것이다.

요번에는 진득하게 안개가 주는 묘함에 이끌렸다.

 '주인공이 나쁘다, 봐줄 만하다.'

이런 말로는 성인들이라 어울리지 않고

각자의 마음속에 잔상이 남을 텐데...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던 고향이란

무한히 품어주는 곳이라 여겨지는 바 욕심은

채웠을망정 앞으로 고향 갈 일이 껄끄럽지 않겠나.

신선한 공기 쐬고 오는 줄 아는 아내와

마주함에도 당혹스럽지 않을까!

 

 안개로 둘러싸인 신비로운 풍경들 거닐어보고

잡을 수 없는 촉촉함에 살아 있음을 느끼고

파도 소리와 잔잔한 출렁거림을 만끽하며

문학을 좋아한다는 후배, 음악 선생, 조씨와 더불어

푸근한 고향 이야기와 어머님 산소에 다녀오는

범생이었으면 소설이 재미없었을지도 모른다.

안개가 잦아 그 어떤 일도 흐릿해지는 그곳 무진 일지!

작가는 그런 무진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2021년 1월  25일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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