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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뜨니 안개가 자욱하였다.

아침 산책을 나가려다 앞이 안 보이고 읍성에 가면 많이 걸을 것이라 접고는...




 뒹굴뒹굴하다 문득 밖을 보니 똑같은 지점인데 이제는 山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와~~~ 안개가 山을 지우다니 무서운데?...ㅎㅎ...'




 8시에 출발이라 일찍 씻고 정리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우리가 묵었던 펜션은 방에 커튼이 없어 불빛이 들어오고 위풍이 쪼금 있었으나 ...

바닥이 따뜻하여 하룻밤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옆은 이런 모양으로 빨간 동그라미는 그냥 그려진 것이고 녹색 동그라미는 열리지 않는 창문이다.

오른쪽 유리 부분은 거실로 천장이 높았으며 2층까지 연결되어 두 가족은 넉넉하게 잘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근처에 식당이 없어 시내로 나가 콩나물국밥을 먹었는데 시원하니 아침으로 딱 좋았다.

그런데 단체 손님들이 어찌나 많던지 줄 서서 먹었지 뭔가!

속풀이에 좋고 부담 없으니 붐볐을 텐데 계란을 저리 주는 곳은 처음으로 김을 부셔 넣고 먹으라 더만,

노른자가 아직 덜 익어서 혹시 비린내 날까 뜨끈한 국밥에 부어 반숙으로 먹었다.




 다음 일정은 읍성이었는데 식당에서 조금 걸었더니 예고 없이 아름다운 城이 나타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돌아간 듯 신기하였다.




 조선 세종 32년(1450)에 부근의 19개 군현(郡縣)이 참여하여 3년 만인 단종 원년(1453)에 완공했다는 읍성은,

축성 당시 성 쌓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쌓은 구간과 고을 이름을 성벽에 새겨두었다 한다.

예를 들면 "濟州始", "和順始", "羅州始", "癸酉所築宋芝政"...로 제주에서도 성을 쌓으러 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자연석 성곽으로 사적 제145호이다.




 대부분의 읍성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평탄한 곳을 골라 쌓았다는데 고창읍성은 그 반대로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기 때문에 정문이 북쪽에 있었으며 북문인 공북루(拱北樓)의 모습이다.



 북문에서 왼쪽으로 돌기 시작하자 갑자기 고도가 높아졌다.

읍성을 돌 때는 손바닥만 한 돌을 머리에 이고,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에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를 돌면 극락승천한다니 세 바퀴를 돌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할까?

나무 앞에 보이는 작은 건물은 죄수를 가두는 옥(獄)이었다.




 성벽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낮은 산에 오른 듯 경치가 훤했다.

고창에서 읍내, 그러니까 제일 번화가인 듯하였다 


 이제 경사진 곳을 지나 평평한 곳에 이르러 한 바퀴 둘레길을 걸어볼 참이다.

성 밖을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성 안쪽은 부드러운 흙길로 소나무가 울창해 시선을 멈추게 하였다.



 가다 보니 이런 멋진 건물도 나타났는데 東門인 등양루로 옹성을 지어 적으로부터 보호하였으며,

지금도 보기 좋았으나 봄이면 성벽 아래 철쭉이 화사하겠더란다...^^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 4~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의 옹성...

6개의 치성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 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었다.




 성벽 윗길은 걸을만했지만 양쪽에 난간이 없고 다소 울퉁불퉁하며  흙길이 아니라 다리에 무리가 올 수 있으므로,

연세 드신 분들이나 술 드신 분들은 성 안이나 밖으로의 산책도 좋을 듯하다.




 서문 진서루에 도착했으니 이제 거의 다 온 셈이다.

성 밖은 직선의 높은 담이지만 안쪽으로는 낮은 둔덕으로 편안했으며 흙길이라 좋았다.

왜 침을 막기 위해 세워진 城으로 침략이 있을 시에는 백성들이 읍성들로 들어와 함께 싸우며

살 수 있도록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을 만들었단다.




 해마다 음력 9월 9일을 전후하여 4일간 '모양성제'가 있어 조선시대 관군 복장을 갖춘 수문장이

고창읍성을 수호하는 장면을 재현한다니 참여해보는 것도 좋겠다.

담 너머로 가지가 발달한 소나무는 이름하여 '다박솔'이며...


 

 성벽을 한 바퀴  돌고 안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관청이 보였다. 수령(守令)과 그 가족들의

식생활을 비롯하여 손님 접대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회계 사무를 보던 곳이란다.


 

 

 관청에서 내려오는 길은 사거리를 이루며 커다란 느티나무가 듬직하였고...




 약속시간을 몇 분 앞두고 고창동헌(高敞東軒)에 들렀더니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곳으로

평근당(平近堂)이란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고 고을을 평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이었다.

그대로 지켰으면 고창이 고향인 녹두장군의 농민반란은 없었을 텐데 가진자의 욕심은 그동안 줄어들었을까!





 고을 수령과 잠깐 만나고 내려오니 아쉬운 듯 화사한 단풍이 발길을 잡았다.

고창은 장어와 복분자가 입을 즐겁게 해주고 고창읍성이란 유적은 나라를 지킨다는 마음 하나로,

주변에서 19개 마을이 선뜻 달려와 수많은 돌을 쌓으며 이룬 邑城이니만큼 푸근함과 묵직함을 선사해주었다.




  2018년  11월  15일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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