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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태공원은 한 바퀴 돌아도 그다지 넓지 않다.

아니, 걷기를 한다 생각하면 그렇고... ㅎㅎ

천천히 햇볕 쬐며 산책한다 싶으면 알맞다.

 

 

 

 반대쪽으로 20분쯤 걸었을 때 전망대가 나왔다.

흙길이고 자연미가 가득해서 좋더니

전망대도 반가웠다.^^

 

 

 

 빙빙 돌아가는 3층 높이였다.

계단보다 느리지만 편안하였다.

 

 

 

 올라가며 기와집이 보이 길래

 '정약용 생가로구나!'

반가워서 전혀 의심하지 않고 몇 장 담았다.

 

 

 

 내려다보는 풍경이 정겹더니...

 

 

 

 물빛을 보는 순간...

얼음이 녹아 있어서 신기하였다.

얼음과는 불과 60m의 거리나 되었을까?

 

 

 

 궁금해서 지도를 다시 찾아보았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에서 생태공원은

약 2km 떨어져 있었는데 성질과 온도가 다른 두 물이

만났고 물의 흐름이 있어 얼음이 얼었어도

얇았을 것이라 추측되었다.

 

 

 

 강물은 갑자기 깊어지며 옥빛이었다.

1925년 대홍수가 일어나 생가가 떠내려갔다니 

정비사업으로 물속을 깊이 팠을 것이다.

 

 

 

 햇빛의 양에 따라 물빛이 달라졌나?

조금 더 위쪽은 청색을 띠었다.

 '아름답구나!'

 

 

 

 전망대를 내려와 생가인 줄 알았던 곳에

다가갔더니 못 들어가게 줄이 쳐져 있었다.

 "정약용 生家 아닌가요?"

 "주차장에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다 보면 보여요!"

 

 

 

 다시 걸어 나와 북쪽으로 500m쯤 이동한

곳에서 우람한 거중기(擧重器)가 반겨주었다.

1792년 정조의 명령을 받아 1627년에 

독일인 선교사 슈레크가 저술한 기기도설에 실린 

그림을 보고 고안했다 하며 거중기 때문에 4만 냥이

절약됐다고 정조가 칭찬했다는데 1702년 남자 노비의

몸값이 8냥이었다니 가늠해 보았다.^^

 

 

 

거중기 앞쪽으로 정약용 생가가 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 39세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돌아온 고향(경기도 남양주)으로 맨 오른쪽 건물이

사랑채인 '여유당'이다. 여유당은 "겨울에 찬

시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머뭇거리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이 경계하라!"라는 뜻으로

조용히 살아보려고 내려왔지만 다음 해에

18년간 유배를 떠나게 된다.

 

 

 

 당시에 쓰던 물건이었을까!

아무것도 없는 흙마당이며 부엌에서

그들의 향기를 맡아보고 싶었다.

 

 

 

 안채 뒤꼍에 우물이 있었고 담 너머의

작은 동산에는 선생과 부인의 합장묘가 보인다.

회갑을 맞아 지은 '자찬묘지명'에서

'알아주는 이는 적고, 꾸짖는 자는 많으니......

백세 후를 기다리겠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당시에는 모함으로 편치 않으셨지만

그 후로 흡족하지 않으셨을까?

 

 

 

 생가는 1986년에 복원되었다 하며 20년(?) 전에

갔었던 그대로의 모습이었지만 좌우로 많이

넓어져 있었다. 실학박물관도 구경할 겸 

활기찬 계절에 다시 한번 오고 싶은

곳으로 남았다.

 

 

 

 

  2022년 3월  11일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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