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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원에 도착하자 건너편에 작은 섬처럼 보였던 곳이 시사단(試士壇)이었다.

1792년 3월 정조가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신설하여

안동 지역의 인재를 선발토록 시험을 치른 곳이라는데 원래는 그냥 강변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수위가 상승하자 10m 높이로 석축을 쌓아 지금의 모습이 되었단다.

무엇인지 모르고 근사하다 했다가, 아하~~~ ^^




 안동호가 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도산서원은 병산서원과 함께 앞에 강물이 있는 점이 같았으나...

흐름과 머물러 있는 물이라 맑음이 달랐다. 녹조가 심해서 물감을 탄 듯했으니 걱정스러웠다.

작은 배가 물을 휘저으며 달리는 모습에 물 섞는 작업을 하는 것 같다며 웅성웅성 했었다.




 서원의 첫 모습은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한옥마을 같았다.

병산서원의 모습을 만대루의 시원함으로 부드러운 듯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에 비유한다면...

도산서원은 우직함으로 꼿꼿하게 올라온 가을 국화와 같았다 할까?...^^




 서원 오른편 입구에 멋스러웠던 나무는 400년된 왕버들이라고 한다.

한 그루인 줄 알았더니 두 그루라는데 이곳이 어떤 곳인 줄 미리 파악하고 심사숙고(深思熟考) 해서 커나간 듯하다.

물을 좋아하는 버드나무일 테고 물가가 옆에 있긴 했지만 뿌리까지는 멀어서 상관없어 보였는데...

옆으로 늘어진 왕버들이 때로는 유교의 완고함에서 벗어나 보라는 것처럼 자유스럽게 느껴졌다.

공부만이 아니라 風流를 즐길 줄 아는 선비가 되면 어떻겠느냐는 듯이...^^




 서원 앞에 서있는 '열정'이란 이름의 우물로 도산서당에서 식수로 사용하였단다.

샘물을 두레박으로 끊임없이 퍼내어 마시듯 자신의 노력으로 몸과 마음을 부단 없이 채우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우물 속 작은 식물들이 귀여웠고 사용하지 않아도 물이 비교적 맑아 보기 좋았다.




 앞에서 건물을 대했을 때는 좁은 공간이라 생각됐는데 위로나 양옆으로 숨겨진 곳들이 많아...

짧은 시간에 속속들이 구경하기에는 날도 더웠고 약간 벅찼다.




 퇴계 이황이 낙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은 선생의 체취(體臭)가 묻어나는 곳으로

직접 설계하셔서 4년에 걸쳐 1561년 (명종 16년)에 설립되었다니 얼마나 뿌듯하셨겠는가!

왼편으로 선생이 거처하시던 방(완락재)이 보이며 마루는 암서헌이라 하였는데 공부하던 자리에서 여행객들이

자유롭게 누웠으니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실까, 이노옴~~~ 하실까!..^^





 서당 앞 '정우당'에는 연꽃이 심어져 '군자의 꽃'이라 쓰여있어서 처음 들어봤기에 찾아보았다.

더러운 물에서도 깨끗한 꽃을 피워 예로부터 선비들에게 사랑받은 꽃이라네!




 선생께서는 아마 꽃을 좋아하셨던 모양이다.

 '절우사'라 하여 매화, 대나무, 국화, 소나무를 몸소 가꾸셨다니 말이다.

70세에 돌아가실 때도 청매화분에 물 주라는 유언을 남기셨다니...

관기였던 두향이가 그리우셨을까, 아니면 꽃이 주는 기쁨을 일찍이 아셨을까?




 이곳은 '농운정사(隴雲精舍)'로 제자들이 공부하고 휴식을 취하던 기숙사인데...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뜻에서 한자의 공(工)자 모양으로 짓도록 하셨단다...ㅎㅎ

진짜 工字처럼 허리 부분이 날씬하고 양쪽이 튀어나온 건물이었으며...


 


 공부하던 동편 마루를 '시습제(時習齊)'라 하였고...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觀瀾軒)'이라 하였다. 瀾은 물결 란으로...

물결을 보는 곳, 물결이 주는 교훈을 깨우쳐서 끊임없이 공부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직접 쓰셨다 한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고향집 서재도 관란원이라는데 이곳에서 따왔을까!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곳인데 일전에 도둑을 만나 중요한 도서는 인근의 국학진흥원으로 옮겼고,

일반 서적만 보관하고 있단다. 동 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습해(濕害)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으로 지었다.

 '수많은 책이 나에게 光明을 준다'라는 뜻이라니, 얼쑤우~~~♬




 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 '전교당(典敎堂)'은 조선 선조 7년(1575)에 건립된 대강당이다.

이황(李滉)의 학덕을 추모하는 제자들과 유림(儒林)이 중심이 되어 창건하였는데...

황(滉) 字가 '물 깊고 넓은 황'이라니 글씨 하나로 미소가 지어졌다.




 선조가 하사한 현판의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썼으며...

도산서원에 걸 현판이라고 미리 가르쳐 주면 손이 떨려 망칠 수 있어서 거꾸로 '원서산도'로

쓰게 했다는데 마지막 '도'를 쓸 때에 눈치를 채고 붓이 조금 떨려 삐뚤어졌단다...ㅎㅎ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거꾸로 썼다 하나 글씨 간격이 일정하고 힘이 있었다.




  이곳 '전교당(典敎堂)'에서는 가르침도 있었지만 유생들이 모여 회의도 하고 향사 등 서원에서 하는 행사를

집전하는 곳이었는데 퇴계 선생의 가르침으로 앉는 자리는 나이순으로 정했다 한다.

이를테면 무대의 왼쪽 맨 앞자리가 으뜸 상석!...^^




 유생들이 거쳐가면서 공부하던 기숙사인데 선생님 생전에 있었던 건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동편 건물을 박약제(博約齋)라 하고 서편 건물을 홍의재(弘毅齎)라 하였다.

마침 청년들이 서원의 유생들처럼 모델이 되어주어서 고맙기도 했다...ㅎㅎ..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은 도산십이곡, 퇴계 선생문집 등을 보관해오다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목판을 만들어서 찍었으니 망정이지 일일이 써서 책을 만들어주었다면

학생 수가 늘어나며 스승 되기도 어려웠을 거란 쓸데없는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



 문이 잠겨있었으나 안쪽을 살피니 책을 보관하던 장소가 이렇게 아름다웠다.



 

 상덕사에서 향사를 지낼 때 음식을 보관했던 장소(典祀廳)로 상덕사는 현재 수리를 하고 있었다.

해설해주시는 분께서 서당과 서원의 차이점을 설명해주셨는데 서당은 교육만 담당했던 곳이고,

서원은 교육은 물론 사당이 있어서 모신 분의 제까지 지내는 곳이라 해서 간단하게 정리가 되었다.

교육과정의 난이도나 입학자격은 차이가 있었을 줄 안다.



 

서원을 관리하는 분들의 살림집으로 상, 하에 고직사(庫直舍)가 있었는데...

현재 관리하시는 분이 사시는지 댓돌에 신발이 여러 켤레 보여서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나왔다.




 박물관으로 구경을 하던 중 약속시간이 되어서 자세히 못 봐 아쉬웠으나...




 퇴계 이황의 짧고 굵은 친필을 구경해보고...ㅎㅎ




 안석이라 하여 가는 왕골로 만든 '기대는 방석'으로 선생께서 사용하시던 유품이라 기분이 쨘했다.

헤진 부분으로 속을 엿봤더니 같은 왕골을 잘게 잘라서 넣었던데 오늘날 쿠션에 비교하리오!




 나오다 보니 왼편으로 한 곳이 더 있었다. '역락서재(亦樂書齋)'라 하며 퇴계 선생과 친구 분이셨던 鄭竹軒(정죽헌)이

17세이던 어린 아들(지헌, 정사성)을 이곳에 맡기며(당시 고 제자들은 30~40세였다함) 지어주셨다는데,

퇴계 선생 생존 당시에 있었던 건물은 도산서당과 공부工자의 기숙사, 그리고 역락서재였으니 소중한 건물이었다.

 '역락'이란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나온 말로 '또한 기쁘다'란 뜻이라...

기쁘게 찾아오는 서재라 할까?


 이로써 안동 시티투어로 다녀온 곳들을 정리했는데 참고 자료를 찾아보아 많은 공부가 되었으며,

유학자라 고집스럽고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퇴계 이황 선생에 대해서도 어렴풋하게 알게 되어 기뻤다.

선생은 완고한 유학자였다기 보다는 깊은 사유와 부드럽고 넉넉한 성품이셨으며 섬세하셨고 열정적이셨다.

당연히 우리나라 교육발전에도 이바지하신 분으로 단점이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아 오히려 아쉬웠다.

작은 체구로 얼굴도 고우시던데 안동을 다녀와 퇴계 이황 선생을 사모하게 되었네!...^^*

 

 



 2017년   9월   20일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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