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층 서쪽은 두 개의 커다란 방과 화장실, 옷방이 있었다는데 초기에는 아들의 놀이방으로 쓰다가 이후에는 손남방으로 썼다 하며 지금은 아내 메리의 미술작품이 여럿 보였다. 집에서 일해주던 하인과 도와주는 여인들을 그렸는데 솜씨가 좋았다. 몇 가지 색을 쓰지 않고도 우리네의 정서와 맞는 색감과 부드러움과 여백의 美를 느낄 수 있었다. (집에서 나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음) 알버트와 메리는 1942년 조선총독부가 외국인 추방령을 내리자 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배를 타 약 두 달 만에 캘리포니아 롱비치에 닿았단다. 이렇게 대륙을 돌아갔다니 여행으로 삼았을지 모르지만 추방당해서 재산을 정리할 시간이나 있었을까! 지도를 보는 내가 피곤함이 느껴졌다. 2층은 오롯이 가족들만 사용하는 곳이어서 아끼는 물..
'딜쿠샤'란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란 뜻으로 1875년 미국의 네바다 주에서 출생한 앨버트 W. 테일러와 영국 출신의 메리 린리 테일러 부부가 살던 집이다. 이 집에 대한 소개가 신문에 여러 번 나와서 언젠가는 가봐야겠다 생각했는데 독립문역 3번 출구에서 사직공원 방향으로 200m(?)쯤 오르다 보면 바로여서 찾기 쉬웠다. 광산기술자였던 아버지 일을 돕기 위해 1897년에 앨버트는 조선에 입국하였고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는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나 연극배우로 동양의 여러 나라를 순회하던 중 일본 요코하마에서 앨버트를 만났다고 한다. 1917년에 결혼한 후 광산사업과 '테일러 상회'를 경영하였고 일제 강점기인 1919년에는 미국 AP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 3.1 운동, 제암리 학살 사건..
가을이면 저절로 밤 수확이 그리워진다. 친구가 그곳에 없으면 밤이 아무리 많아도 와질 까만은 먼저 소식을 전해 오겠냐는 연락을 받고 기분이 좋아 급하게 날을 정하게 되었다. 밤을 수확해서 캐리어에 넣어 오자는 말에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라 솔깃해지며 '무거운데 무사히 들고 올 수 있을까?' 고장이 나도 된다는 중간 크기의 가방을 얻어 길을 나섰다. *** 이쯤에서 잠깐!!! 밤 주을 때 필요한 도구가 뭐냐고 물으시니 올려본다. 장화가 제일 좋지만 없으면 등산화도 좋겠고 보여드린 장갑 두 가지면(자세히 보면 두 가지가 다르다) 집게 필요 없이 밤송이를 맨손으로 까도 아프지 않다. 노란 빛의 코팅된 장갑을 나중에 껴서 두 겹으로 착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담을 시장바구니나 두툼한 비닐이 있으면 된다. ..
봄에 양평에 가려다 기차를 잘못 타 강촌에 도착하여 구곡폭포 가는 길에 은행나무가 많았던 기억과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이 시원찮아서 미련이 남았기에 비 온 끝이라 다시 가보게 되었다. 처음에 갈 때는 역에서 내려 폭포 입구까지 무척 멀다고 생각되었으나 두 번째는 확실히 가깝게 느껴졌다. 역에서 100m를 벗어났을까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남자 두 분이서 말을 걸어왔다. 기차에서 내리는 것을 봤다며 들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나? 걸음이 빠른 분들이었는데 우리와 멀어지는 것 같으면 별 거 보이지 않아도 무엇을 유심히 관찰하는 듯 기다려줘서 폭포 입구까지 꽃이야기 들으며 비교적 쉽게 닿았다. 입장료를 내는데 그분들은 무료혜택을 받기 위한 확인절차를 밟아 얼굴에서도 나타났지만 연장자였다. 애기나팔꽃 이름을..
옛 경기고등학교가 있었던 정독도서관에 놀러 갔다가 학교담 너머로 백인제 가옥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가도 가옥을 둘러볼 수 있지만 예약을 하면 해설에 방방마다 구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지하철 안국역에서 내려 헌법재판소를 지나 가회동 동사무소옆 골목으로 들어서니 의젓한 주택이 나타났다. 근처의 주택 16채를 흡수해 1913년에 지어졌다는 가옥은 소유권이 전전하다가 1944년 당시 외과의사였던 백인제(백병원 설립자)선생과 그 가족이 소유하게 되었으며 1977년에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에 서울특별시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2015년 11월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한다. 놀란 점은 백인제 선생이 6.25 때 납북 되어 그 후로는 전혀 소식을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