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이라 했다. 딱하기도 하지! 성격 탓도 있겠지만 일 때문이기도 했고 어머님이 요양병원에 계시니 언제 소식이 올까 가방에 필요한 서류를 넣고 다니며 항상 긴장감 있는 생활을 했다. 사우나 하나로 만족하며 사는 사람인데 코로나 때문에 동네 목욕탕이 모조리 없어져 온천 있는 곳으로 가보자며 길을 나선 것이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해도 환영했을 것이다만... 같이 가자니 영광스럽기까지 했다. 나 또한 15년 만에 함께 움직이는 것이라 소중한 마음이었다. 아침 6시에 집을 떠난다고 해서 5시에는 일어나야지 하다 5시 21분에 일어나져 서둘렀다. 기차는 7시 20분 출발이어서 더 늦게 가도 된다 생각했지만 15년 만에 그리하자니 입 다물고 그러자 했다. 살면서 ktx 타보는 게 아마 두 번째였지 싶..
주택을 구경할 겸 창포원에 가볼까 도봉구로 향했다. 마침 화장실에 가고 싶어 도봉산역으로 가려다 김근태 기념도서관을 발견하게 되었다. 겉에서 보기에는 소박했는데... 안으로 들어가자 깨끗하고 분위기가 좋았다. 저쪽에 화장실이 있다고 여자분이 안내해 주었다. 도서관에 같이 들어왔는데 밖에서 하는 말을 들었나 보다. 정치가로 가끔 텔레비전에서 본 것 이외에는 이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도봉구에서 도서관을 지어줄 정도면 무슨 커다란 일을 하셨나 싶었다. 민주화를 열망했으며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셨고 고문을 많이 받아 일찍 돌아가신(64세) 듯하다. 그냥 나가고 싶지 않아 구경하기 시작했더니, 밖에서 있던 일행도 마침 안으로 들어와 자세히는 아니지만 층마다 걸어서 올라가 보았다. 길에서 봤던 건물보다 뒤쪽으..
경복궁의 가장 깊숙한 북쪽에 위치한 건청궁은... 궁 안의 궁으로 불리며(청와대가 바로 뒤에 있음) 사대부 주택 양식으로 지어졌다. 왕의 공간인 장안당, 동쪽 왕비의 공간인 곤녕합과 별채인 복수당으로 구성되었는데 9월 18일까지 고종과 왕비가 살던 공간을 특별히 개방한다고 해서 다녀왔다. 장안당 입구에서 신발을 바꿔 신어야 했다. 사람들이 많으니 입구와 출구가 확실하였다.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에 지어져 초기에는... 역대 임금의 초상, 왕과 왕비 왕세자 빈의 의례용 도장, 임금의 글씨를 보관하고, 고종이 경복궁 후원(現 청와대 자리) 에서 행사가 있으면 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들러 신하들을 만나기도 했던 장소였다. 그 후로 경복궁에서 중요한 공간이 되었던 시기는 1885~ 1896로 왕비가..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에서 특별전시가 있다니 친구들과 약속을 하였다. 아무런 일정이 없는 줄 알았지만 몇 개월 전에 메모를 하지 않았던 일정이 문자로 와서 다른 날로 바꾸려 했으나 9월에는 꽉 차 빈 날짜가 없었고 친구들 만남도 여러 명이라 약속날짜를 다시 잡기 번거로워서 집에서 일찍 나와 볼일을 보고 만남 장소로 향했다. 40분 정도 일찍 도착하여 국립궁중박물관에 더위를 피할 겸 잠시 들렀다가 국왕의 즉위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면류관은 머리에 쓰는 최고의 격식 모자로 앞 뒤에 옥과 구슬이 늘어뜨려져 시야를 가리고 좌우에도 작은 솜뭉치가 매달려있다는데 보이진 않았다. '악은 보지 말고 나쁜 말은 듣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단다. 왕위에 오르는 방법은 크게... 양위(讓位), 사위(嗣位), 반..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의 흥례문 앞이다. 잼보리 대원들이 앉아서 쉬는 듯하였다. 어느 나라 청소년들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서양인 동양인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단체로 움직이는 이들도 있었지만 몇 명이서나 하물며 혼자 다니는 청소년도 있었는데 나이가 지긋한 대원들도 보여 인솔자구나 추측했다가 이들과 같이 다니는 청소년은 드물어서 어디서나 선생님과 함께 하기는 부담인가 싶었다. 힘내라는 뜻으로 "하이" 하면 웃으면서 대답해 주었다. 근정전 앞이다. 창경궁보다 도시 중심에 가깝다고 구경꾼들이 더욱 많았고 외국인들이 절반은 넘을 듯해 우리나라만의 경복궁은 이미 아니었으며 코로나 이후에 분위기가 한층 화사했졌음을 실감하였다. '이들을 실망스러움 그대로 보낼 순 없다'고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런 마음이었..